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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부터 시작 되었던 일이 벌써 해를 넘겨 1987년 1월의 일이 되었다.

나는 헤더헌터가 비밀로 했기 때문에 미국인 사장과의 인터뷰가 끝난 후 비로소 그 회사가 어느 회사인지를 분명히 알았다. 우습게도 내가 한남동에 위치한 스위스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을 때 그 회사는 바로 그 부근의 건물에 있었고 또 그 회사의 간부가 바로 내 해병대 동기생이었기 때문에 방문까지 한번 했던 적도 있었다.

SMS(SAMSUNG MEDICAL SYSTEMS)라는 합작회사는 한국의 삼성그룹과 미국의 세계적인 기업 GE사 간에 합작투자를 해 만들어진 의료기기 분야의 회사였고 내가 인터뷰를 할 때는 이미 공장과 본사 건물을 수원의 삼성그룹 전자단지 내에 지어 이사를 한 뒤였다.

그런데 실은 이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행태나 경영방식이 어떤지를 알고 있는 국내의 재벌기업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자존심을 먼저 내세우는 삼성그룹의 임직원들로써는 매우 폐쇄적인 마인드와 방어적인 자세를 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300여명의 임직원들이 모두 삼성 측이었는데도 지분이 미국 측이 더 많은데다 경영권이 GE사에서 온 두 사람에 의해 우지좌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성측이 선진된 첨단의 기술을 이전 받아 우리 것으로 한 단계 끌어 올리려고 한다면 먼저 그 자세부터가 호의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하는데도 역시 경험의 뒷받침이 부족했던 터라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입장이 되어 진퇴양난의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특히 SMS의 삼성측은 자신들의 마인드를 고쳐 선진 경영의 체제로 점차 쫓아가는 것까지는 가능했겠지만 합작 회사가 되기 전부터 삼성 측에서는 GE의 첨단의료기기를 국내 시장에 팔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매출의 신장이 부진한 것까지는 변명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에 머리 좋은 임원들은 이 모든 문제도 역시 GE측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매도를 해 막강한 비서실을 잘 이해시킴으로써 곧잘 넘어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미국 측 사장과 부사장 그리고 나머지 한국 측 임원과 부서장들이 서로 비난을 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져 그로부터 회사의 분위기는 점점 말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GE사의 미국인 사장에게는 OK가 된 상태였지만 합작투자의 지분을 가진 삼성그룹으로부터의 동의는 받지 못했던 터라 헤드헌터의 전달에 따라 삼성그룹에 있는 공동대표이사와 비서실에 선을 보이기 위해 삼성 그룹의 본사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나의 위치는 한국을 떠나는 미국 측 부사장과의 임무 교대였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내 밥줄은 미국 측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였던지 삼성그룹에서 보는 나에 대한 시각은 내가 마치 미국 사람들의 앞잡이쯤으로 비춰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비서실의 젊은 상무는 매우 친절하게 나를 대했고 오히려 잘 부탁한다는 말로 깍듯이 했다. 그것은 아마 내 이력서를 보고 느낀 점이 있었으리라 짐작을 했는데 실은 과거 삼성에서 그를 데리고 있었던 직속상관이 바로 나의 고교 동기생이라 말은 하지 않아도 대강은 내가 누구라는 것을 짐작은하고 있었으리라 믿었다.

다음에는 삼성그룹의 한 회사를 맡아 대표이사를 하면서 내가 갈 SMS사의 등기부 상 공동대표이사를 하고 있는 분의 방으로 안내 되었다.
그분은 내 이력서의 내 커리어에 대해서는 별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 가족 사항을 매우 자세히 물었다. 형제가 둘 뿐이라 그랬는지 내 형님의 커리어에 대해서 더욱 질문의 초점을 맞추었다.

먼저 그는 내 형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는 질문부터 했다. 나는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대답만 간단히 했다. 그는 흥미로운 듯 어떤 과목을 가르치느냐고 다시 물어 국제정치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는 점점 관심 있는 표정을 하면서 나중에는 이름까지 물었다. 나는 평생 내 이름보다는 누구의 자식 또는 누구의 동생이라는 말로 통했기 때문에??약간은 말하기가 쑥스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이름을 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름을 듣고 난 그는 매우 놀란 기색을 하면서 친형님이냐고 다시 물어 나는 그렇다는 대답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순간 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여태껏 구 문굉이라는 내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이 순간까지도 당당히 살아 왔는데 왜 또 내 형님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지가 불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분은 과거 서울대학교 학생일 때부터도 그랬고 언론계에서도 그랬고 또 삼성그룹에서 까지도 이미 정평이 나 있던 인사였지만 당시 나로서는 전연 알지도 못했고 또 내 형님과는 1년 정도 후배가 되는 것은 물론,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삼성그룹의 본사를 나오면서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 났구나.... 아직은 아니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가 추구하는 외국인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되는 길이 열리겠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다음날 헤드헌터로부터 전화가 집으로 걸려 와 받아보니 내가 부담을 느낄까 싶어 얘길 하지 않았는데 실은 여섯 명의 경쟁자가 있었고 그 중에서 내가 뽑힌 것이며 다만 한 가지 남은 일은 이제 미국으로 건너가 "GE MEDICAL SYSTEMS"의 본사에서 최종 인터뷰를 받아야 모두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또 모든 비용은 SMS 사에서 지불할 것이며 인터뷰의 날짜는 1987년 1월16일로 잡혀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지쳐 그만 두었으면 두었지 미국은 가지 않겠다는 말을 불쑥 했다.
헤드헌터는 이미 결판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저 인사를 하러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라 했고 또 직급이 높아 아직 GE사에서 사람을 보지도 않고 그렇게 높은 직급을 준적은 없다고도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을 다녔다고는 다녔어도 인연이 없어서인지 미국을 가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도를 펴놓고 목적지를 보니 겨울에는 여간 추운 곳이 아니었고 비행기로 가더라도 몇 번은 갈아타야 했다. 또 창피한 일이지만 이나 저나 내게는 그런 추운 곳에 입고 갈 오버 코트 하나도 준비 된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내가 쥐고 가야 할 잡비조차도 없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딸아이와 아들 녀석이 설에 어른들로부터 받은 세뱃돈을 내게 내 놓으면서 우선 오버 코트를 한 벌 사 입게 했다. 물론 나에게도 부모 형제가 있지만 스스로 손을 벌리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먼저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이 생각 되었다.

나는 충무에서 굴양식 사업으로 부자가 된 친구에게 얼마 안 있다 갚을 테니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그는 승낙을 했으면서도 여직원이 보낸 것 같은데 아마 착오가 생긴 것 같다는 둥 이상한 말을 자꾸 해 아예 포기를 하고 다른 친구로부터 이십 오 만원을 얼른 빌려 미국으로 갈 채비를 서둘렀다.

SMS사에서 끊어준 티켓을 보니 서울-도쿄-엘에이-덴버-밀워키로 되어있었다.
나는 과거에 여행사의 부장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유지들을 보고 단번에 매우 싸구려 티켓을 끊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X헐놈들 내가 이래도 전에는 비지니스 클라스만 타고 외국을 다녔는데 그래 이코노미 클라스라니?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초행길에 비행기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야 하도록 만들었는가?

나는 내심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일이란 다른 한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내가 영어를 할 줄 안다고는 하지만 그야 말로 신토불이의 영어에다 남보다 그래도 조금 나은 것이 있다면 생활 영어가 아니라 경리나 관리 영어에 불과한데 이 참에 좀 더 긴 여행을 하며 옆 사람과 대화를 열심히 하면 "브레인 스톰잉"(두뇌 회전)이 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는 스스로를 달랬다.

나는 먼저 동경까지 가서 LA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마침 내 옆 좌석에는 켄터키 대학의 1학년짜리 여대생이 앉았다.
그는 잠시 겨울 방학동안 한국의 모 켐프에서 대령으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만나고 켄터키로 돌아가는 중인데 동경에서는 다시 나와는 달리 시아틀 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명랑한 여학생이라 어찌나 말을 많이 하던지 나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다행스러웠다.

실은 나도 출발하기 전 이태원에서 짝퉁의 007 구찌 가방을 하나 샀는데 그가 자랑을 하는 명품 가방도 잠시 보니 역시 이태원에서 쇼핑을 한 짝퉁이었다. 나는 동경으로 가는 중 수다스러운 그 여학생의 장단에 맞추어 거의 쉬지도 않고 계속 영어로 대화를 했더니 그때서야 내 스스로도 말문이 다시 트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결국 우리는 동경에 내리자 말자 서로 헤어졌고 나는 혼자서 무려 두 시간 가깝게 나리다 공항에서 대기를 하다 LA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나이가 나와는 얼 주 같은 호주 사람이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영사기를 세일 하러 각국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한국도 가끔씩 방문을 한다는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

나는 그에게 솔직히 내 사정을 얘기했다. 만약 내가 말을 많이 하더라도 이해를 하라는 양해도 미리 구했고 그도 쾌히 승낙을 했다. 그러나 동경에서부터 LA까지는 장장 열 시간 정도나 가야 하는 먼 구간이라 나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계속 하다 결국 나중에는 내 스스로가 지쳐 더 이상은 말도 하기가 싫어졌다.

새벽에는 비행기가 미국 본토로 접근을 했다.
우선 말로만 들었던 로키산맥의 장엄함은 내 시야를 키우고 있었다.
역시 땅덩어리가 큰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구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고 스스로 흥분이 되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내가 LA에서 여장을 푼 곳은 헐리우드가 가까운 이스턴 호텔이었다.LA에서 이틀을 묵고 또 모레 아침이면 말로만 들었던 덴버라는 곳으로 향해 그곳에서 다시 밀워키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만 했다.
나는 이틀을 이곳에서 어떤 확실한 계획도 없이 머무는 것으로 날짜를 조정해 놓았기 때문에 오전 내내 잠을 잔 후 비로소 시간을 달리 보낼 궁리를 해 보았다.

나는 혹시나 하고 LA에서 잘 나간다는 친구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한국일보사의 LA지국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먼저 호텔의 남자 교환수와 통화를 했는데 정신이 어찌 되었는지 잠시 한국말이 나오다 말았다. 교환수는 그게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수화기를 놓고는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통화를 요청했다.

내 친구는 한 때 그곳에서 교민 회장을 했기 때문에 신문사에서는 으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 문의를 했던 것인데 역시 그것이 주효 해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내 친구는 내 외가쪽으로 먼 친척벌이 되었고 해방 후 부산에서 함께 살았을 때는 나와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또 친구 집이 서울로 이사를 와서는 내가 서울에 올 때마다 며칠씩 자기 집에서 묵어가기도 했기 때문에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친구와 소식이 닿아 저녁에는 그가 차를 몰고 호텔로 와 한국 식당인 우래옥으로 안내를 했다.
말하자면 한국의 우래옥이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이었다. 내 친구는 느닷없이 내가 해병대 출신인 것을 알고 하나 물어 볼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와는 인연이 깊은 J 상사의 이름을 갖다 대었다.참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이었다. J 상사가 해병대 헌병대에서 근무를 했을 때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인물도 좋고 말하는 솜씨도 능란한 데다 영어의 구사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데다 시간이 촉박 하다고 여겨 그저 J상사의 프로필에 대한 얘기만 친구에게 들려주고 만나면 내가 안부를 전하더라는 말만했다.

다음날 저녁은 호텔에서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은 버몬트라는 동네의 한국 식당을 찾아 혼자서 뚜벅 뚜벅 밤길을 걸었다. 걸어서 가는 도중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람들이 살다 떠났던 것 같은 폐허의 동네가 있었고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불고기집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젊고 아리다운 한국 여성들이 서버를 하고 있었고 식당의 뒤쪽 음침한 곳에는 멕시칸으로 보이는 사람이 불고기 판을 닦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젊은 남자 주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다 반가웠던 것은 그가 바로 해병대 출신이었던 것과 월남전에서의 자기 소대장이 나의 동기생이었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서로 소식이 닿았으나 자기에게 사정이 생겨 급히 뉴욕에서 자기 누이와 함께 식당을 이곳으로 옮기는 통에 그만 연락이 두절 되었는데 한국에 돌아가시면 꼭 소식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젊은 남자 주인은 나처럼 밤길을 그런 식으로 절대로 걸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주었고 내가 호텔로 돌아 올 때는 교포가 아르바이트하는 택시를 불러 주었다.

LA에서 덴버로 가기 위해 국내선 비행기를 탔을 때는 내 옆자리에 매우 매력적인 중국 처녀가 자리를 했다. 혹시라도 홍콩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미국인이라고 했다.

살기는 뉴욕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며 고교를 졸업 한 후는 사진기술을 배우는 과정의 학교인지 학원인지를 다니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내가 얼른 알아듣기가 힘들어 인스티튯이냐고 했더니 무어라 대답을 하는데 잘 알아듣지를 못해 대충 넘어갔다.
나는 미국 사람은 맞은데 외형적으로는 중국 사람이라 미국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 처녀는 당당하게 미국은 여러 인종이 모여서 사는 합중국이며 누구나 자격을 갖추면 미국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내가 하도 말을 쉬지 않고 계속하니까 그 처녀는 너무 지겨웠던지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해 나는 아차 싶어 사과를 했는데 그는 자기가 생각을 해야 할 것이 있어 그랬는데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정중히 말을 해 무안했던 내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LA에서 덴버까지는 대략 두 시간 정도가 더 걸리는 거리 같았고 일단은 로키산맥을 넘어야 했다. 물론 LA는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기후가 마치 우리의 가을 날씨 같았으나 로키산맥을 넘어서는 그렇지를 않았다.
덴버 공항은 눈이 내려 벌써 비상이 걸려 있었고 승객 중에는 착륙을 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말을 해 나는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한참을 선회를 하다 겨우 착륙 허가가 떨어졌는지 빙판처럼 반짝이는 활주로를 조심스럽게 착륙했다.

나는 이곳 덴버에 내려서도 두 시간을 더 기다려 오후 네 시가 되어야 목적지인 북쪽의 밀워키로 가는 비행기와 연결이 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 아무른 안내방송이 없는 가운데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그리고 바깥에는 불안하게도 눈만 점점 더 쌓이는 것 같았다. 덴버의 국제공항은 남쪽지역으로부터 모이는 비행기들의 기지 같았다. 바깥은 그렇게 추운데도 반바지 차림으로 혹은 택사스의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승객들이 눈에 띄었다.

오후 네 시가 넘었는데도 덴버에서 북쪽 방향으로 가는 비행기는 아예 없는 것 같았다.
공항 로비에는 오가도 못하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붐벼 나는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내일 아침 8시30분이면 밀워키로부터 50분정도 떨어져있는 워키샤라는 곳의 메리옷 호텔에서 스케줄에 따라 안내자를 만나야 하고 아침 식사를 한 후는 회사로 다시 안내를 받아 인터뷰에 응해야만 했다.

잠간사이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데스크 앞 여유 공간에는 임시 데스크가 하나 세워졌고 그곳에 여직원 한명이 서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다.
나는 무슨 일인가하고 유심히 쳐다보았더니 현재로써는 모든 비행기들이 결항 상태라 목적지 까지 되도록이면 빨리 갈 수 있는 다른 교통편의 정보를 조언해 주기 위해 일대일 상담을 위한 서비스 데스크였다.
내가 그래도 마음을 놓은 것은 그 여직원이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가슴에 달고 있는 명찰에 Lee라는 글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사람들 틈에 끼어 줄을 섰다.

이윽고 내 차례가 오자 먼저 반가운 마음으로 "한국 사람이지요?"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기는 했으나 더??이상의 대꾸가 없었다. 나는 기가 찼다.
말하자면 한국말을 모르는 미스 리였던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영어로 미국이 초행길이라는 것과 내일 아침 8시 반에 밀워키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는데 그 시간 내에 갈 수 있는 어떤??방법이 따로 없느냐는 질문과 다른 사람들 중에는 육로로 시카고를 간다는데 내 경우는 그렇게라도 빨리 우회해서 가는 방법은 없겠느냐고물었다.
그는 차라리 언제 갈지는 몰라도 지금의 비행기 편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조언을 했다.
나는 기다리면 틀림없이 오늘밤에 이륙을 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더니 그것에 대해서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실망을 앞세우고 막무가내 식으로 그저 공항의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비행기가 뜰 것이라는 방송만 학수고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을 했다.
그러나 미리 회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내 사정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신사복을 입은 채 공중전화를 찾으니 그 넓은 로비에 공중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대학생인 듯한 남자 둘이 내 앞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학생들을 잡고 내 사정을 얘기했다. 그 중 한 학생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공중전화 박스가 있는 곳은 아는데 그곳에서 밀워키까지 전화를 하려면 많은 동전이 필요하고 만약 동전이 없다면 전화 카드가 있어야 하는데 둘 중 어느 것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했다.

그 학생은 내가 한심했던지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내가 그를 따라간 곳은 조그마한 공항내의 작은 카페테리어 같은 곳이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카운터에 가더니 동전을 10불정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다.
카운터에 있는 사람은 동전 통을 들어 보이면서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바꾸어 가 지금은 동이 났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옆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던 학생 같이 보이는 어떤 젊은이가 무슨 일이냐고 나를 안내한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자기가 전화 카드가 있으니 안내도 해주고 카드도 쓸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일어섰다.
나는 맥주 집까지 안내를 하고 애를 썼던 학생들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덴버의 국제공항은 내가 느끼기에 어찌나 넓었던지 전화박스를 찾아 가는데도 너무 멀게 느껴졌다.
안내를 했던 학생은 우선 자기가 번호를 돌려 내가 찾는 사람과 일단 통화를 하고는 나를 바꾸어 주었다.

나는 지금의 사정을 얘기하고 만약 일이 잘 풀리면 그때 다시 밀워키에 가서 집으로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던 나는 나를 안내했던 학생에게 10불을 주려했다.
그는 한사코 받지를 않으려고 했으나 나는 미국이 처음이라 한국 사람의 풍습대로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기어이 그 돈을 받게 했다.

배도 고프고 진땀도 나고 이제 할 일은 다시 밀워키 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선 햄버그 하나와 콜라 한 병을 사 먹은 후 나는 트렁크와 짝퉁 007 구찌 가방을 양손에든 채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다시 뚜벅 뚜벅 찾아 들어 갔다.

저녁 8시가 되자 어떤 무리들이 있는 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눈치를 살피니 묶였던 비행기가 출발을 하게 되었다는 방송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후 몇 십 분이 지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곳에서 환호가 터졌다.
나는 무엇인가는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꼈고 밀워키로 가는 사람들도 옹기종기 모여 모두 희망에 부풀고 있었다.

원래 사람이 많이 모이면 튀려고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한 늙은 영감이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보고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소?"

"네 , 서울에서 왔습니다."

"아 우리가 탈 비행기가 서울에서 온다는데 너무 시간이 걸리는구먼.."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깔깔거려 나는 망신스러웠다.

에라 빌어먹을 싶어 나는

"그런데 그 조종사는 미국인 이래"하고는 맞받아 주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더 크게 깔깔거렸다.

이왕지사 나도 내 친 걸음에 그 영감과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많이 나누었고 영감은 교육자재를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이라고 했다.
나는 말머리를 돌린 후 월남전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제 월남전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고 신기한 듯 물어보는 질문도 더러 하는 사람이 있어 얘기가 더욱 길어졌다.
잠시 얘기가 끊어지자 아주 단단하게 생긴 멋쟁이 하나가 내 옆으로 닥아 오면서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자기는 미 해병대 장교 출신이며 내가 월남에 있었을 당시 청룡부대 포병대대에 파견을 나가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가 너무 반가워했다. 이제는 영감도 관중들도 필요가 없었다. 둘만이 오붓하게 각자 나름대로의 얘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밤 열두시가 가까워 오자 우습게도 그 큰 공항의 로비는 많은 함성과 함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고 이제는 오로지 밀워키로 가는 촌놈들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오후 네 시에 출발을 했어야 하는 비행기가 결국은 밤 열두시가 조금 지나서야 밀워키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새벽 세시가 거의 가까워서야 인디언 말로“물이 모인다(Gathered water)"는 밀워키라는 곳에 도착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키가 엄청 큰 경찰들이었다. 나는 이 시간에는 공항에서 택시를 잡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도 운이 좋았던지 흑인이 운전하는 택시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운전석 옆에는 이미 흑인 여인이 한명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고 내가 고개를 갸우뚱 했더니 얼른 운전하는 녀석은 손님이 아니고 자기 애인이라고 소개를 했다.
나는 그러냐고 하면서 매우 행복해 보인다고 했더니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빠른 말로 둘이서 희희낙락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다.
나는 예약 된 방으로 들어 서자말자 내일 아침 로비에서 만날 담당자에게 먼저 전화부터 걸어 무사히 도착을 했다는 신고를 했다.

아침이 되자 나는 키가 크고 싱글 양복을 입고 나오겠다던 담당자를 얼른 알아 볼 수 있었고 그도 나를 쉽게 알아보았다.
우리는 함께 식당에서 아침을 같이 하면서 한국에 관한 얘기와 일반적인 경영에 관한 얘기들을 거의 한 시간가량이나 했다.

세계적인 재벌 그룹사인 GE사의 방사선 의료장비를 만드는 본사와 공장은 정확히 말을 하면 밀워키가 아니고 더 떨어진 워키샤 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시카고니 밀워키니 워키샤니 하는 말들은 모두 인디언들의 말을 그대로 따서 붙인 것이라 했다.
회사의 출입구에는 제복을 입고 권총까지 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매우 의아스러운 생각을 가졌지만 규칙에 따라 그들이 있는 카운터 앞으로 가 기록부에 이름과 방문 목적을 써 넣은 다음 방문객의 명패를 받아 왼쪽 가슴에 달았다.

나를 안내한 담당자는 자기 방으로 먼저 안내를 했다.
유리 곽처럼 생긴 방 입구에는 여자 비서가 앉아 있어 직급이 꽤 높은 친구라는 것을 나는 그제 서야 알아차렸고 그는 우선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나에게 물어 "굿 아이디어"라고 했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비서에게 자기 것과 함께 두 잔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는 여태까지의 그 친절하기만 하던 안면을 잠시 바꾸는듯 하더니 내가 오늘 인터뷰를 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과 직책들이 적힌 종이를 내게 보여주며 자기가 젤 먼저 순서가 되어있으니 이제부터 시작을 하자는 것이었다.
스케쥴을 본 나는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직급과 이름이 명단에 들어있었을 뿐 아니라 하루 종일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것을 이제 사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했던 헤드헌터의 말대로 그저 인사 정도로 끝이 날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만리타향인 미국까지 왔는데 이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장에 갇히는 새의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나로서는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런 경우에는 물러서는 것 보다는 먼저 앞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담담자에게 힘을 주어 가며 말을 했다.
알다시피 나는 여기 오느라 너무 힘이 들었고 나는 아직도 시차로 인해 젯레그에 걸려 있는 상태니 몇 명을 빼 달라고 우겼다.
그는 난처한듯이 생각을 한참하고는 고문 변호사 한명만 인터뷰에서 제외를 시켜 주겠다고 하면서도 가서 인사는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더 우길 수도 없어 그러마고 했더니 이제 자기 차례니 우선 공식적인 인터뷰를 지금부터 시작하자고 해 나는 또 우겼다.
우리가 벌써 아침을 먹으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얘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얘기를 또 할게 있느냐고 했더니 그가 순순히 그러자고 응해주어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먼저 그는 나를 변호사가 있는 방으로 안내를 했다.
가는 도중 살펴보니 벽이라는 벽에는 모두 홍보물이 붙어 있었는데 한 가지는 심장 마비가 오는 이유 20가지가 모두 담배를 피우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한 가지는 지금 당장 당신이 퇴직을 하면 이러 이러한 혜택이 주어진다는 회사의 몸집 줄이기 운동의 선전이었다.

변호사가 있는 곳은 방이 무려 다섯 개나 되었다.
그것은 그 회사의 일과 관련하여 변호사가 다섯 명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가운데 만들어 놓은 홀에는 긴 의자가 놓여 있었고 상담을 하러 왔는지 그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노무자들도 여러 사람이 보였다.
나는 인터뷰에서 제외 당한 변호사에게 정중히 우리식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도 마침 상담을 하고 있던 중이라 사람이 앉아있는데도 일어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자는 얘기와 악수를 하는 것으로 서로 상견례를 마쳤다.

이제 본격적인 다섯 사람의 인터뷰가 오전과 오후에 걸쳐 있게 되었는데 맨 처음은 인사를 담담 하는 총책임자였다.
역시 유리 곽처럼 생긴 방으로 들어가니 벌써 내 이력서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먼저 이력서를 보고 이것 저 것을 열심히 물어 사실 그대로를 찬찬히 설명해 주었는데 실은 내가 인터뷰에는 이미 선수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문제는 맨 마지막으로 던져주는 하나의 논술 같은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인사 책임자 답게 "여태까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되었다고 생각하는 일과 가장 실망을 했다고 생각하는 일을 각각 하나씩 얘기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도 이미 생각을 해 두었던 터라

"가장 보람되었던 일은 탄광에서 노조의 스트라이크가 있었을 때 해병대의 전우들과 의기투합해 성공적으로 무마 시켰던 일"이고 가장 실망을 주었던 일은 회사의 주주들로부터 탈세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였다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탄광에서 스트라이크를 했던 적도 없었고 해병대의 전우들을 찾은 적도 없었지만 우선은 내가 월남전에서 훈장을 두개나 받았다는 사실에 그들은 어느 정도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상의 시나리오를 썼던 것이다.
그는 일어서더니 재정담당 최고 보스에게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그는 영국국적을 가진 매우 일에 대해 무자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 사람을 너무 좋아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도와주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 사 알았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는 빙긋이 웃어 보이며 내 이력서를 한번 훑어보는 것같이 제스쳐를 한번 하고는

"미스터 쿠! 자네 얼마나 터프해? 월남전에도 참전을 했고 훈장도 두개나 받았군 그래"하고 큰 소리로 말을 던졌다.

"알다시피 한국 해병대는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 매우 터프합니다"

"이력서에 무슨 책을 쓰고 있다고 적었는데 어떤 책이지?" 알면서도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다국적 기업에 근무하는 후배들을 위해 길잡이가 되는 “Practical English for Business Management”라는 책을 썼는데 곧 한국에 돌아가면 출판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매우 만족한 듯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자기 차석에게 가 보라는 말을 했다.

실은 내가 소속 될 본사의 부서는 생산, 기술부서의 F/A(Finance &Administration) 한국 책임자의 직책이며 SMS회사 전체로는 사장 다음인 제2인자의 자리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를 쪼개 처음에는 인터뷰의 스케줄에도 없었던 생산, 기술 재정부서의 몇몇 매니저들을 더 만나보게 스케줄을 짰던 것 같았다.

차석은 먼저 내가 제대를 한 직 후 미국에서 한국에 처음 들어 온 세계적인 회계감사회사인 Arthur Young & CO.에서 근무한 것에 대해 매우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특히 그 회사가 처음 launch했을 때 어떤 Client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나는 옳다 싶어 한국의 국책기업이나 외국투자법인에서 AID나 IBRD로부터 차관을 들여 온 기업들 대부분이 내가 있었던 회사의 Client들이었다고 했더니 고개를 꺼덕였고 그도 역시 내가 출판을 할 책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관심을 보였다.

점심시간에 앞서서는 자재와 재공품 그리고 완성품에 대한 회계처리를 질문하기 위해 담당자가 창고와 생산 라인으로 나를 안내해 갔다.
나는 항상 내가 나이가 너희보다도 더 많고 경험도 알짜로 한 사람인데 너희 보다야 못할까? 하는 자신감을 앞세웠다.

"원가 계산?" 나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원가 계산은 이러 이러한 종류가 있고 우리나라는 법에 의해 너희와 같은 표준 원가 계산을 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물가지수와 환율의 변동이 너무 심해 어쩌구 저쩌구....
나는 말이 떨어지면 처음부터 묻지 않은 관련 된 얘기까지 모두를 요란사격을 하듯 계속 설명을 해댔다.
그 이유는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질문을 받고 일일이 대답을 하려고 하면 잘못 알아들어 동문서답을 함으로써 당초 모르는 것 보다 더 못하는 결과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담당자는 매우 만족을 하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는 내 담당자가 창고 책임자와 함께 나를 한국으로 치면 마치 민속촌 같은 곳으로 안내를 했다. 분위기나 건물들은 모두 독일식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독일 사람들의 집단 이민 지역이라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인터뷰를 하는 사람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과의 마지막 문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마치 거인 같은 덩치에 콧수염을 기르고 두꺼운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사전에 택사스가 고향이라고 들었던 바가 있어 다소 긴장을 했는데 그 이유는 남부 쪽 사람들의 발음이 매우 듣기 힘들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질문을 하는 말이 무슨 바위가 슬슬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는데 대뜸 한국의 사회적 윤리라는 말이 첫 질문에서 튀어 나왔다.

"뭐? 한국의 social ethics? 한국의 사회적 윤리라니?" 내가 철학 시험을 치루는 것도 아니고 웬 한국의 사회적 윤리를 말하라는 것일까?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순발력이 뇌리로부터 용암처럼 분출 되었다.
이 친구가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옳거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이 사람까지 알고 있을만한 사건? 아, 참 S 대 의사들이 뇌물 사건으로 얼마 전 몇 사람이 구속 되었지.....
나는 되레 "한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는 의사들이 뇌물 사건으로 구속 된 사건을 압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나는“바로 이것이다!”하고 내 딴은 청산유수 같은 대답을 했다.
"사회적인 부정이나 부패는 어느 사회든지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그러한 부조리를 추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고 앞으로는 더 많은 개선이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를 했다.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Well”이라고 한 마디 하더니

"그럼 그 증거가 어디에 있소?"하고는 더 어려운 질문을 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이미 분출 되고 있는 내 뇌리의 순발력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탄광의 사장을 했을 때 이미 사회정화를 위한 정부 단체의 정화 운동에 참여를 해 교육을 받은 적이 있고 또 당신네들은 한국을 경제의 기적을 이룬 나라라고 평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녕 한국 사회가 부패 된 사회라면 어떻게 그런 경제적인 기적을 이룰 수가 있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증거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는 의자를 다시 한 번 뒤로 재끼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이때다! 멈추면 또 어려운 질문이 날라 온다” 하고는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가 질문을 몇 가지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나는 한국에서 이익을 취한 외국 기업들이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철수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는데 이 회사의 경우는 어떤지요?"

" 자, 보시오, 우리는 알다 싶이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고 명성을 중시하는 회사요. 우리 회사는 결코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러면 나는 얼마 동안이나 이 회사에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그건 당신한테 달린 문제가 아니겠소."

"네 잘 알겠습니다. 좋은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이로써 나는 마지막 관문까지 인터뷰를 모두 마쳤다. 벌써 시간은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담당자는 나더러 인터뷰를 한 사람들끼리 미팅이 있으니 30분 정도 자기 방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보다는 도대체 나의 이런 순발력과 영어의 구사능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내 스스로가 의심스러웠다. 결국 나는 필시 조상이 돌본 것으로 이해를 했다.
30분이 내게는 너무 길었다.

내가 인터뷰를 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수포라는 것도 이곳에 와서야 뒤늦게 알고 있었다. 나는 여비서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여비서는 빙그레 웃음을 보이면서 마치 동지를 만난 것처럼 성냥과 담배 한 개 피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문 옆에 있다고 일러 주었다. 사실은 내가 담배를 끊은 지가 벌써 10개월이나 되었다.

이윽고 담배를 피우는 곳에서 연기를 쭉 들이켰더니 어지러워 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 벽을 잡고 한 손으로는 연기를 빨아 들였다.
문을 열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빤히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이윽고 30분이 지나자 담당자가 자기 방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바깥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악수를 청했다.

"합격을 축하해요"

"감사해요"

그는 내가 미국에서 며칠 머무르다 갈 것인지 아니면 바로 갈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인계인수도 빨리해야 하고 내 나름대로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돌아 가야한다는 대답을 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나를 호텔로 데려다 주게 했는데 나는 나중에 알았던 사실로 이곳에서도 교포들을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후보자들이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모두 부적격자로 판정을 했다고 했다.

나는 어떤 것도 생각하기가 싫었다.
호텔방에 들어오자 말자 짝퉁 구찌 가방을 내 팽개치고는 옷을 입은 채 그대로 하얀 카바가 씌워진 침대 메트 위로 몸을 날려 엎어져 버렸다.

"웽~"하는 사이렌 소리가 귀속에서 울려 퍼졌다.
벌써 장장 몇 개월 동안 씨름을 했던 결과던가? 마치 몸과 정신이 분해되어 아스라이 어떤 곳을 향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찌르릉 찌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SMS사의 이사가 서울에서 벌써 연락을 받고 축하한다는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우리 집에도 알려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다시 엎어져 있으려 했으나 이번에는 전보다 더 또렷한 정신이 들면서 새로운 기가 충만해 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담배를 사기 위해 호텔 로비를 찾아 뚜벅 뚜벅 걸어 나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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