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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기쁜교회목사님 설교듣기


창세기 15:1-6

줄리어스 시저가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보고 물었습니다. ‘왜 눈물을 흘리느냐?’ 그랬더니 시저가 대답하기를 ‘알렉산더는 서른이 됐을 때 세계를 정복했는데 나는 오십이 되었어도 이룬 것이 없다.’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레나드 번스타인은 이런 탄식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지휘자들은 나를 지휘자로 여겨주지 않고, 작곡가들은 나를 작곡가로 인정해 주지 않고, 피아니스들도 나를 피아니스트로 여겨주지 않는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탄식하곤 했다고 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도 자신이 존재에 대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살다가 끝날 것인가? 왜 제가 오늘 이 설교를 할 생각을 했느냐. 왜냐하면 세월은 흘러가고 나이는 먹어 가는데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열정, 흥분은 점점 잊혀져가고 젊었을 때 가졌던 꿈은 그게 과연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저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되느냐? 인생은 정말 그런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애당초 나이가 칠십 오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에 그가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온 것입니다. 애당초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지나가고 나이는 먹어 가는데 아브라함이 보니까 자기가 이룬 것은 별로 없습니다. 왜 애초에 가나안땅으로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게 다라는 말이냐,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이냐.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계기 삼아서 여쭈어 본 것입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의 특별함은 하나님께 여쭈어 봤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가 어떠하든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차별성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안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안 물어보는 이유는 첫째는 물어봤자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누가 대답할 것 같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현실이 바빠서, 먹고 살기도 바쁜데 뭐 굳이 그런 질문을 하겠느냐, 다 그런 거지, 이런 생각 때문에. 세 번째는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내가 왜 이 길을 들어섰는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네 번째는 나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고 이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없다. 이제 와서 무엇을 또 알려고 하겠느냐 하는 것이고 그리고 다섯 번째는 여기가 좋사오니 나는 이걸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데를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이유, 여섯 번째는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미 받은 것도 족한데 내가 또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까 이런 생각으로 여쭙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사도행전을 보면 빌립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빌립은 원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 빌립이 사도들보다 더 큰 활약을 합니다. 홀몸으로 사마리아를 복음화하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에디오피아 사람을 전도하고 그리고 성령으로 공간이동까지 합니다. 이건 성경의 유일한 사건입니다. 성령이 그를 낚아채서 한 곳에서 사라지고 다른 데에 나타나게 했습니다. 공간이동을 시켰어요. 아주 영적인 능력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러다가 빌립이 가이사랴라는 곳에 가서 연락이 끊겨 버립니다. 더 이상 그에 대한 성경말씀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면 빌립이 가이사랴에서 딸 넷을 낳고 정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순회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가이사랴에서 정착하고 거기에서 평범한 남편과 아빠로서의 삶을 산 것으로 생각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가 처음 데뷔할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 큰 역할을 할 사람처럼 생각이 되는데 그게 지속되지 못한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의 모습을 보면 사도들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러나 도중에 그가 그 모든 활동을 멈추고 조용한 삶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거기에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는 딸 넷을 낳았는데 그 딸이 다 아빠를 닮아서 영적인 은사가 있었어요. 그들이 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식만 잘 키워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이지만 그러나 빌립의 경우에는 더 큰 것을 기대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입니다. 이건 빌립과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는 많은 세상의 재능이 많은 사람들 중에도 멈추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피곤하기 때문에, 지쳤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습니다마는 그러나 재능이 많고 또 미래가 유망한 사람도 중지하고 멈추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주 여호와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여기에는 비약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여쭈어 봤을 때 하나님이 과연 응답을 하실지 침묵하실지 이것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그야말로 비약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처음 믿은 사람이든 오래 믿은 사람이든 간에 이처럼 하나님에게 자기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을 할 때 정말로 저쪽에서 응답이 올지 이것은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침묵이 있을지 아니면 응답이 올지. 그런데 의외로 차라리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면 침묵만이 있을 뿐입니다. 적어도 그 결과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리스크가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여쭈어 보는 것은 많은 리스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응답이 어떤 응답일지 우리는 알 수 없고 과연 그 응답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과연 내가 원하는 대답일지 그건 우리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비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말을 하면 응답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보세요?’하면 저쪽에서 ‘예, 여보세요’ 응답이 와요. ‘계세요?’ 하면 저쪽에 ‘네’라는 대답이, ‘네’라고 하지는 않겠죠. ‘오냐’라는 대답이 옵니다. 이건 신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도 응답이 왔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그 사람이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라는 응답이었습니다.

요즘에 부분개봉을 해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스위스의 어느 수도원 내부를 공개한 영화입니다.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수도원에 들어가 6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찍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이기 때문에. 그래서 영화제목이 위대한 침묵인 것입니다. 침묵. 왜 이 수도사들이 침묵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것입니다. 이들이 침묵 자체를 위해서 침묵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 제작자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가 열왕기상 19장 12절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더라’입니다.

침묵, 그러나 그냥 침묵이 아니고 위대한 침묵입니다.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침묵으로 시작하지만 침묵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소리가 침묵을 깨뜨립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이 경험을 자기 아내 사라에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했다면 사라의 반응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당신 노망이 들었다. 주책 좀 그만 부리라. 이제 와서…. 안 그렇습니까. 아내의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런 면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과 나는 이해하지만 가까운 데 있는 사람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공유하지 못하고 그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수가 있어요. 이것이 믿음의 성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우리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하나님이 응답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대목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내 소원이 이루어졌느니, 문제가 해결이 됐느니, 기적이 일어났느니, 이런 것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린다는 그 자체만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 인생은 위대한 것이고 나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이고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내게 엄청난 용기와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이고 그 자체가 내 삶에 시사하는 바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어떻게 약속하시더냐, 이런 데에만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는 그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증거요,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요, 나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요, 나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신다는 증거요, 그동안 내가 가졌던 많은 의심과 많은 두려움이 전혀 불필요했다는 증거요, 또 내 믿음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많은 대적들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신원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음성이 내게 들렸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것이고 거기에서 우리는 이미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은 침묵 외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침묵을 두려워합니다. 죽음도 침묵이요 사람이 홀로 있는 것도 침묵이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 침묵 너머에 나 아닌 다른 인격체로부터 내게 주시는 음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음성이 나에게 우호적이고 나를 위하고 나를 기억하고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전능자의 음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음성을 듣는 것과 그 음성의 내용이 ‘나를 사랑하는 말일세’ 얼마나,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몰라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추측이 옳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어요. 아브라함은 이대로 살다가 끝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어 보기를 잘한 것입니다. 안 여쭤봤더라면 큰일 날 뻔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생각은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생각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안 여쭤봤더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아있는 동안에 과연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봤느냐? 그건 아니지요. 그는 이삭 한 명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두고두고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있는 동안에 시작해서 죽은 후에도 두고두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시작해서 앞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이방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셨어요. 예수님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러나 떠나가신 후에 이방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국 사람들이 당신 믿는 것 보지 못하셨어요. 중국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 보지 못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 모든 방언이 예수님께로 계속해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도 진지하게 하나님께 여쭈어 봐야 됩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 계시든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주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쁜교회목사님 설교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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